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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9년 10월 26일 바다의별 pr. 삼성산 성지순례
작성자 지병두 (ip:)
  • 작성일 2019-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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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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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월곡동성당 상지의옥좌 꾸리아직속 바다의별 Pr.(단장 정대화 바오로)에서 삼성산성지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8명의 단원중 개인사정으로 3명이 불참하고 5명의 정단원과 1명의 협조단원으로 구성하여 6명이 성당차를 이용하여 아침 8시에 출발하여 성지순례를 마치고 오후 2시에 월곡동성당에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9시 5분 삼성산성지에 도착하니 마침 동대문시장성당(주임 최부식 사도요한)에서 본당의날 행사로 이곳 삼성산성지로 전신자순례를 오셔서 오늘일정에 함께할수있는 영광된날이 되었습니다.

성지로 올라가며 이름표와 물 그리고 간식을받아 약 10여분을 올라가니 자그마한 동산에 성지의 모습들이 보입니다.
성지의 모습들을 사진으로 담고 미사참례도 동대문시장성당 주관 주임신부님 집전으로 함께하니 이보다 좋을수가 없습니다.

미사참례후에는 몇개조로 나누어 십자가의길을 걸으며 삼성산 성지의 3분의 성인의 유해가 묻힌 유래를 생각하며 잠시나마 성인들의 영혼과 영원한 안식을 기도합니다.

십자가의길을 마치고는 동대문시장성당에서 준비해주신 도시락(비빔밥)으로 맜있는 야외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동대문시장성당 주임신부님으로부터 이곳 삼성산성당(주임 김충식 대건안드레아)신부님과의 인연을 들었는데 두분이 고교동창이시고 사제서품도 함게 받으셨다는 소식으로 소개해주시고 성지해설을 1시간정도 감명깊게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는 동대문시장성당과 단체사진도찍고 두분의 신부님과도 기념촬영을하는 영광도 누렸습니다.
오늘 멀지않지만 처음으로 와보는 삼성산성지를 방문하여 하루를 알차고 뜻깊은 성지순례를 할수있음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두분의 신부님께도 이자리를 기해 늘 영육간에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잠시나마 오늘 해설을 바탕으로 짧게나마 성지를 소개해 봅니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난 1839년에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앵베르(Imbert 라우센시오 范世亨) 주교를 비롯한 성 모방(Maubant 베드로 羅伯多祿) 신부와 성 샤스탕(Chastan 야고보 鄭牙各伯) 신부의 유해가 1843년부터 1901년까지 58년간 안장되었던 곳입니다.

순교자들의 시신은 3일 동안 모래와 함께 그대로 새남터 백사장에 가매장되었다. 신자들은 변복을 한 포교들이 사방에서 매복하고 있었으므로 발각될 것이 두려워 그곳에 잠입할 수가 없었다. 4일째 되던 날에는 용감한 신자 3명이 그곳에 잠입하였다가 그중 1명이 체포되었지만 더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아마도 시신이 부식하기 시작한 때문일 것이다. 이를 알고 있던 박순집 베드로의 부친 박바오로 등 7~8명의 신자들은 약 20일 후 죽음을 각오하고 백사장으로 들어가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는 데 성공하였다. 세분의 시신을 지금의 서강대 뒷산인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신부, 샤스탕 신부가 노구산에 안장된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미 순교자 현양 운동을 자발적으로 실천해 오던 조선 신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이 안장된 곳은 이내 신자들의 순례지로 바뀌게 되었던 것 같다. 이에 교회 지도층 신자들은 신자들의 순례로 인해 순교자의 무덤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면, 조선 사회의 분위기로 볼 때 또 어떤 일(예를 들면 부관참시와 같은)이 일어날지 몰랐으므로 이장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3~4년 후에 교우들이 (3위의 무덤을) 그대로 두면 일이 틀어질까 하여 노구산에 가서 파내어 본 즉 해골만 남은 것을……박바오로의 선산인 삼성산으로 이장하였다.

1843년 삼성산으로 이장 -당시 관 위에 숯가루로 기록한 비문에는 그 이장 연도가 1843년으로 쓰여져 있었다. 이 시기는 ‘김 프란치스코가 증언한 시기’(증언 5-②)와도 일치한다. 이때 이장 장소로 결정된 곳이 바로 관악산 서쪽 봉우리인 “삼성산(三聖山)의 북쪽 끝자락”이었다.

이 세성인은 1857년에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1882년 5월부터는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을 위한 교회 재판이 시작되었다. 또한 1885년에 시복 판사로 임명되어 활동하던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는 1886~1887년에 삼성산으로 가서 순교자들의 묘역을 확인하였다. 여기에 김 프란치스코와 박순집 등이 참여하였을 것이다. 이어 1891년 10월 29일 뮈텔 주교가 이곳을 순례한 이래 그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으로 옮겨질 때까지 매년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 교수와 학생들이 이곳을 순례하면서 묘역을 손질하였다. 그러나 순교자 묘역 순례와 자발적인 현양 운동은 이미 박해 시대부터 이루어져 오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 천주교회의 전통 가운데 하나였다.

1901년 10월 21일 세 순교 성인의 유해는 -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직자 묘지로 이장하였고 그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이장하였다.

1970년 봄, 대방동 본당 주임 오기선 신부는, 최석우(안드레아) 신부의 자료 고증과 정원진(루가) 신부의 회고를 토대로 삼성산 무덤 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 해 5월 12일에는 옛 무덤 자리에 ‘삼성산 순교 성지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 노기남(바오로) 대주교, 그리고 박순집의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축성식을 가졌다.

1981년 9월 6일에는 신림동 본당 신자들이 노기남 대주교의 집전 아래 삼성산에서 세 복자 묘비 제막식을 갖고 기념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로써 삼성산을 순례 성지로 성역화 하려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84년 5월 6일 -세 복자들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諡聖)되었다. 1989년 서울대교구와 신림동 본당에서 세 성인의 묘소 자리 일대의 임야 약 16,000평을 공무원연금관리공단으로부터 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 명의로 매입하였다.

1989년 9월 10일에는 세 성인의 무덤을 조성하여 명동 대성당 지하 묘역 안에 남아 있던 성인 유해 일부를 가져와 이 무덤 안에 안치하고, 제대 등의 설치를 완료한 뒤 교황 대사 이반 디아스 대주교와 파리 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 배세영 신부, 오기선 신부, 유영도 신부의 공동 집전으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1992년 9월 24일 삼성산 본당이 신림동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정되면서 삼성산 성지의 관리는 삼성산 본당에서 맡게 되었다.

삼성산 본당은 1993년부터 본당내에 현양위원회를 두고 본당 차원의 현양운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즉, 성지 순례객과 삼성산을 등반하는 교우들을 위하여 매주일 11시에 성지 미사를 봉헌하고 있으며, 매월 21일에는 세 성인의 치명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순교자 현양 미사가 정례적으로 봉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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