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의 단순함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예레미야의 강한 하느님 체험은 단순함과 자신의 연약함에서 어우러져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하였던가?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 는 말이다. 좋은 일은 단번에 되지 않고 많은 시련이 있고 나서야 된다.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사랑의 체험 즉 사랑의 실천은 많은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사랑과 희생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었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나서는 은총이 되었다. 또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사랑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 이면에는 고통이 있었음을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사랑의 찬가를 통해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여기서 예레미야 예언자와 사도 바오로 스스로도 고통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달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냥 자기 삶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끝까지 살아간 신앙인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 때 그 의미를 깨닫게 하시지만, 고통의 대가는 이미 예수님께서 다 치러 주셨다. 그래서 고통 가운데에서 주님께 매달리는 것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고통은 신비이다. 신비인 것을 어찌 우리 인간이 깨달을 수 있겠는가? 예언자 예레미야와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고통을 수반하면서도 끝까지 사랑을 실천하였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졌다.” 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빠져 보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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